긴 장마가 이어지던 8월 어느 날, 신정동 해누리타운에 있는 도서관에서 김희정 기획자를 만났다. 맑은 얼굴에 또렷한 눈빛이 뜨겁고도 서늘한 직업인 문화예술 기획 업무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할 것 같은 인상이다. 김희정 기획자는 문화예술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공연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졸업 후 중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어요. 이십대 후반에 귀국하여 ‘김덕수패 사물놀이’에서 공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극장 운영, 축제, 예술단 관리, 지원 사업, 무대 보조 등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지요. 출산 후에는 몇 년간 프리랜서로 주로 젊은 전통예술 단체의 지원 사업을 진행했고 지금은 타루와 통기획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김희정 PD의 십 년 스토리가 단숨에 요약된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켜에 망울망울 붙어 있는 땀방울의 이야기는 얼마나 많겠는가? 중국 대륙에 꿈을 품고 중국까지 날아가 살던 씩씩한 젊은 여성이 이제 한국의 전통예술 공연 기획자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또한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양천구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으로서 지역에 대한 애정도 남다를 거라는 기대가 들었다.
“목동 아파트가 처음 들어섰을 때 양천구로 이사 와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지금껏 양천구 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지요. 이전의 모습도 많이 기억하고 있고요. 1998년에 양천구민회관이 생겼는데 개관 이듬해 영화 <쉬리>를 천 원에 본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영화를 보려면 종로나 신촌까지 가야했는데 주민들에게 큰 문화 혜택의 계기가 되어주었죠.”
어린 시절부터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부지불식 성장해 지금은 예술가의 상상을 현실로 실현시켜주며, 작품이 관객을 잘 만날 수 있도록 보이지 않은 곳에서 많은 손길을 기울이는 일을 하고 있다.
“공연 일을 하며 가장 보람 있는 순간”
“공연 일을 하며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관객들이 공연 시작을 기다리며 로비에서 설레는 모습 그리고 공연 관람 후 한결 행복해진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에요.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었던 공연은 작년 10월 중국 상하이에서 곤극 <아이 햄릿>과 <판소리 오셀로>를 함께 무대에 올린 경험이었습니다.”
김희정PD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키우고 있다. 학교 생활이 정상화되지 못해 초유의 혼란을 겪고 있는 초년생 학부모로서 김희정PD도 고충이 많다. 워킹맘이자 문화예술인의 삶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많은 워킹맘이 그렇듯 반쪽짜리 사회인, 반쪽짜리 엄마로 줄타기 같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내면의 갈등을 조율하고 병행이 가능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자기 개발 시간도 부족하고, 고용도 불안정하고 코로나 시대에는 특히 취약 계층의 교집합에 놓인 상황 같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쟁취해온 일인 만큼 여전히 만족도 크고, 계속 해보고 싶은 호기심과 열정을 품고 있습니다. 사회인, 양육자의 입장이 되고 나니 제도와 정책의 영향으로 내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또 제한되는지 체감하며 무거운 책무도 느끼게 됩니다. 양천구의 문화예술도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고요.”
“양천구에 좋은 무대가 많아져서 가까운 곳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김희정PD는 몇 해 전부터 지역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아이를 양육하고부터 지금껏 살아오던 지역을 확장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지난 6월에는 지역문화 기획단체인 플러스마이너스 1도씨와 양천문화재단이 기획한 ‘지역이해 워크숍’에서 강연하는 기회도 가졌다. 신정동의 주민 이야기, 시대에 따른 문화 양상 등을 짚어보며 자신이 사는 지역을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양천구에 뿌리를 내리고 거주해온 주민으로서 문화예술 종사자로서 지역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과 바람은 무엇일까.
“문화생활을 경험하고자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까지 나서는 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에요. 양천구에 좋은 무대와 전시가 많아져서 어르신, 장애인, 아이, 양육자 등이 가까운 곳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예술을 통해 삶에 숨통이 트이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양천구 관객들을 모시고 공연장 로비의 설렘을 나누는 기회가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문화예술을 기획하는 전문가로써 지역문화에 대한 관심을 통해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찾아보면 양천구에는 재미있는 소재들이 많아요. 스케이트 메달리스트도 여럿 배출했고 스포츠 동호인들도 끈끈하지요. 스포츠 특구라는 특징을 살려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안양천이라는 소중한 생태계, 울창한 나무를 품고 있는 공원과 단지, 특별한 문화유산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개발해서 주민들에게 좋은 터전으로 전달되면 좋겠어요.”
김희정 기획자는 무대에 공연을 올리는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 양천구에서 살아가는 주민, 시대와 문화 속에서 흔들리는 생활인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침착하게 들려주었다. 삶에 단단히 다리를 붙이고 선 그의 목소리는 주위에 힘을 주는 사려 깊고 친근한 소리로 길게 울려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