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창으로 봄 햇살이 들어온다. 오후 햇살이 바닥에 떨어져 네모꼴 빛상자를 만든다. 신비하고 감미로운 고요가 사방에 퍼진다.
이곳은 뮤지컬 연습실. 기다란 벽의 한 면을 거울이 채우고 바닥엔 마루가 깔렸다. 누구든 이곳에 들어선다면 온몸의 감각이 절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데굴데굴 구르고 소리를 질러보며 일상에 갇힌 몸을 활짝 펴고 싶을 것이다.
4월 봄바람이 부는 오후, 이곳의 주인장인 문동진 대표를 인터뷰했다. 문 대표는 양천구에서 공연 기획의 길을 뚝심 있게 걸어가는 연출가이자 제작자다. 미술과 퍼포먼스를 결합한 공연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2010년부터 양천구에서 공연장을 열고 작품을 올렸어요. 그때 만든 공연기획사 이름이 ‘드라폼’인데 ‘그림, 소묘’라는 뜻의 드로잉(drawing)과 퍼포먼스(performance)를 결합한 말이에요. 배우가 무대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공연을 펼치는 형식으로 작품을 제작했지요.”
“청년 문동진, 자신이 살아온, 자신이 잘 아는 이곳에 소극장을 열다”
문동진 대표가 다부진 어조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정동에 꾸민 드라폼 극장은 관객을 꽤나 불러모았다. 대표 작품은 <고흐즈(Goghs)>.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이야기 줄기로 삼아 배우가 고흐의 화풍을 무대에 재현하면서 색채의 생명력과 퍼포먼스의 역동성을 펼쳐내는 작품이었다. 공연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양천구의 작은 극장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인기도 얻었지만 어려움도 많이 겪었어요. 관객 수라는 것이 사회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급감하기도 하거든요. 지금은 ‘그림말 아트컴퍼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연극과 드로잉과 노래를 결합한 뮤지컬을 계속 제작하지요. 객석에 관객이 딱 두 사람만 있다고 해도 그 발걸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무대를 만듭니다.”
이십대 나이에 공연계에 입문한 후로 쭉 배우 생활과 제작 활동을 이어오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새내기 배우 시절, 무대에서 열심히 드로잉쇼를 펼쳤는데,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이 다가와 말했다. “어? 한국 사람이네요?” 아니,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알았냐고 묻자, 홍콩 사람인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사가 없는 넌버벌 퍼포먼스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고흐즈>를 공연할 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이 작품의 주제가 꿈을 포기하지 마라, 간절히 바라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거예요.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과 포토타임을 할 땐데, 초등학교 삼사학년쯤 된 어린이 관객이 저한테 묻는 거예요. ‘아저씨는 꿈이 뭐예요?’ 그 순간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응,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꿈이야.’ 그렇게 대답하긴 했는데, 그 무렵 나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나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죠.”
문동진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세 가지 면모를 다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그는 아티스트다. 미술과 연극을 다 배운 예술가로서 드로잉 퍼포먼스를 능숙하게 펼칠 줄 안다. 둘째, 그는 제작자다. 걸어갈 방향을 정한 후 작품을 기획, 제작하고 공연장을 이끌어가는 경영자의 경력을 다져왔다. 셋째, 그는 교육자다. 문동진 대표는 현재 양천구 협력예술강사로서 청소년들과 만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는 공연계에 들어와 일찍이 교육연극에 눈떴다. (사)한국교사연극협회, 한국교육연극협회 활동을 하면서 연극의 교육 효과를 실천하고 있다.
“혼자 하는 캔버스 작업이 작게 느껴졌어요.”
“제가 중학생 때 사춘기를 호되게 앓았어요. 미술로 방향을 잡았다가 연극을 접하면서 저 자신이 무대 체질인 걸 알게 됐죠. 혼자 하는 캔버스 작업이 작게 느껴졌어요. 아이들이 모여서 공연을 만드는 경험을 하면 시야가 확 넓어집니다. 연극은 아이들의 정서에 공감해주고, 입시 경쟁에서 벗어난 단비 같은 시간을 선사해주거든요. 아이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깨닫게 해주죠. 건강한 메시지와 방향성을 아이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어요.”
양천구에서 자라고 머리가 굵어, 이제는 양천구에서 공연 제작과 연습실 운영과 연극 교육이라는 삼박자 활동을 펼치고 있는 문동진 대표. 그의 발걸음이 믿음직스럽다. 양천구의 문화예술은 이런 실천가들과 더불어 나날이 풍성해질 것이다.